


비운의 선구자 모란-소니에 L
제1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되었을 때, 비행기는 서로 총을 쏘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눈’ 역할만 했죠. 조종사들은 적기를 만나면 손을 흔들거나, 기껏해야 권총을 쏘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 낭만적인(?) 시대를 끝내고, **”비행기 앞머리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시대”**를 연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의 모란-소니에 L입니다. 우아한 양산(Parasol)을 쓴 듯한 모습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발톱, 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개발 배경: “아래가 잘 보여야 정찰을 하지!”
모란-소니에 사(Morane-Saulnier)는 전쟁 전부터 날렵한 단엽기(날개가 하나인 비행기)를 잘 만들기로 유명했습니다. 1913년, 그들은 군대의 요구에 맞춰 새로운 2인승 정찰기를 개발합니다.
파라솔 윙(Parasol Wing)의 탄생: 정찰기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상 관측’**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단엽기는 날개가 조종석 옆에 있어 아래쪽 시야를 가렸습니다. 설계자 레이몽 소니에(Raymond Saulnier)는 묘안을 냈습니다.
“날개를 동체 위로 띄우자!”
날개를 동체보다 높은 지지대(Strut) 위에 얹어, 조종사가 날개 아래쪽으로 지상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습이 마치 양산을 쓴 것 같다고 하여 **’파라솔’**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2. 모란-소니에 L의 주요 특징
이 기체는 당시 기준으로는 꽤 진보적이었지만, 동시에 조종하기 까다로운 비행기였습니다.
① 파라솔 단엽 날개
앞서 언급했듯 날개가 동체 위에 떠 있어 하방 시야가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위쪽 시야는 날개에 완전히 가려져, 훗날 공중전에서는 위에서 덮치는 적을 보지 못하는 약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② 윙 워핑 (Wing Warping)
현대 비행기처럼 날개 뒤의 에일러론(보조익)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날개 전체를 비틀어서(Warping) 방향을 바꿨습니다. 조종간이 매우 무거웠고 섬세한 조작이 필요해서 초보자가 다루기엔 위험했습니다.
③ 로터리 엔진과 유선형 동체
가벼운 로터리 엔진(Gnome 또는 Le Rhône)을 장착했고, 동체는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원형에 가깝게 매끄럽게 제작되었습니다. 덕분에 동시대의 복엽기들보다 속도가 빨랐습니다.
3. 역사적 혁명: “프로펠러를 뚫고 총을 쏘아라”
모란-소니에 L이 항공 역사에 남은 진짜 이유는 바로 무장 시스템 때문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조종사 **롤랑 가로(Roland Garros)**는 비행기 앞쪽으로 기관총을 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쏘면 총알이 자기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박살 낼 위험이 있었죠.
무식하지만 확실한 해결책 (Deflector Plates): 레이몽 소니에와 롤랑 가로는 프로펠러 뒷면에 **’강철 쐐기(편향판)’**를 덧대었습니다.
기관총을 마구 쏘면, 대부분의 총알은 프로펠러 사이를 지나갑니다.
운 나쁘게 프로펠러에 맞는 총알은 강철 쐐기에 맞고 튕겨 나갑니다.
최초의 에이스 탄생: 이 위험천만한 장치를 단 모란-소니에 L을 타고, 롤랑 가로는 1915년 4월 한 달 동안 독일기 3대를 격추하며 세계 최초의 ‘에이스’ 칭호를 얻게 됩니다. 적들은 프로펠러가 도는데 총알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렸습니다.
4. 비운의 결말: 기술 유출과 포커의 역습
하지만 모란-소니에 L의 영광은 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불시착: 1915년 4월 18일, 롤랑 가로의 기체가 엔진 고장으로 독일군 진영에 불시착합니다. 그는 비행기를 불태우려 했지만 실패했고, 독일군은 **’프로펠러 편향판’**의 비밀을 손에 넣었습니다.
포커의 개량: 독일군은 이 기체를 분석한 뒤, 안토니 포커에게 개량을 지시합니다. 포커는 튕겨내는 방식 대신, 아예 프로펠러가 올 때 총알을 멈추는 **’싱크로나이즈 기어(동조 장치)’**를 개발해 포커 아인데커에 장착합니다.
결과: 결국 모란-소니에 L의 혁신은 더 강력한 적(포커 아인데커)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연합군은 ‘포커의 공포’라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 모란-소니에 L 제원 요약
승무원: 1~2명 (조종사, 관측수)
길이: 6.88 m / 날개폭: 11.20 m
엔진: 놈(Gnome) 또는 르 론(Le Rhône) 9기통 로터리 엔진 (80마력)
최고 속도: 115 ~ 125 km/h
무장: (초기) 없음 / (개조) 호치키스 또는 루이스 기관총 1정 + 프로펠러 편향판
별명: 파라솔 (Parasol)
마무리하며
모란-소니에 L은 우아한 외형과는 달리, ‘전투기’라는 개념을 탄생시킨 거친 실험실이었습니다. 비록 그 기술이 적에게 넘어가 더 무서운 무기가 되어 돌아왔지만, “비행기 기수로 조준하여 사격한다”는 현대 공중전의 기본 원리는 바로 이 파라솔 날개 아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