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체 누가 “최초의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거야?
비행기라는 개념이 인류의 상상 속에 자리한 지는 오래지만, 실제로 ‘사람을 태우고, 스스로 추진하며, 공중을 잠시나마 유지하는 기계’를 만들어낸 시도는 19세기 말부터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는 세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과학자적 배경과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빠르게 “유인 동력비행기”를 만들고자 했던 랭글리, 다른 두 사람은 자전거 수리공 출신으로 스스로 비행기를 제작하고자 고안하고 조립하여 “통제 가능한 동력비행”을 이룩한 라이트 형제, 그리고 유럽에서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날아 실물 비행의 가능성을 보여 준 산토스-뒤몽 이였습니다. 누가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인지에 대한 평가는 단순한 순서 싸움이 아니라, “무엇을 ‘비행’이라 부를 것인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성공’인가”라는 정의에 달려 있습니다. 세 인물의 시도와 결과, 그리고 그 뒤의 역사적 평가를 함께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 Samuel Pierpont Langley — 과학자로서 비행기를 개발



사무엘 랭글리는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천문학자이자 과학자로 이름을 날렸고, 1887년부터 Smithsonian Institution 의 제3대 사무국장을 지낼 만큼 사회적 지위가 높았습니다. 그리고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비해익를 만들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증기기관으로 동력을 얻는 무인 비행모형을 실험하였습니다. 실제로 1896년 증기기관을 단 모형 비행체를 띄운 바 있었다. 이후 그는 정부(미 의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당시 5만 달러 정도)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전신형 비행기(heavy-than-air, man-carrying)” 건설에 착수했다.
에어로드롬(Aerodrome A)과 두 차례 비행 실패
완성된 비행체는 1903년 가을 시험 비행 준비가 완료되었고, 10월 7일 처음으로 집보트(houseboat)에 설치한 캐터펄트(catapult) 장치에서 발사되었다. 이 비행체는 날개 길이 약 14.8 m, 길이 약 16 m, 무게(조종사 포함) 약 340 kg이었다. 그러나 발사 후 곧바로 포토맥강으로 곤두박질쳤다. 현장 목격자는 “mortar 한 줌처럼 물 속으로 들어갔다(like a handful of mortar)”라고 표현했다.
12월 8일 두 번째 시도가 있었지만, 이번엔 뒷날개가 꺾이며 또다시 추락했다. 조종사였던 Charles M. Manly 는 간신히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랭글리는 실패 원인을 “발사 장치 문제”라고 주장했지만, 후대 항공공학자들은 에어로드롬 자체의 구조적 약점—날개와 동체의 강성 부족, 비행 중 큰 날개로 인한 하중과 날개 쳐짐에 대한 설계 미비—을 근본 원인 이였습니다.
실제로 1955년 항공역학 저서에서는 랭글리 비행기의 날개 뒤틀림(torsional divergence)에 의한 구조 붕괴 가능성을 언급했으며, 1981년과 2004년 재평가 실험에서도 “당시 설계·구조로는 비행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 실패와 언론의 조롱, 그리고 정부 지원 철회로 인해 랭글리는 항공기 개발을 중단했다. 그는 1906년 사망했다.
랭글리는 충분한 재정과 과학적 명성을 바탕으로 “최초의 유인 동력비행기”를 만들려 했으나, 구조와 공기역학 설계의 미흡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과학자의 꿈”을 날려 버렸지만, 그의 시도는 이후 항공공학 연구의 밑바탕이 되었다.
✈ Wright Brothers — 조종과 제어의 혁신적인 비행기



윌버와 오빌 라이트 형제는 오하이오 데이튼 출신의 자전거 수리·제작자였다. 이들은 항공을 단순히 공학적 실험이 아니라, 실용 가능한 기계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이 1903년 12월 17일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Kitty Hawk)에서 이룬 첫 비행은, 무동력 글라이더 → 동력글라이더 → 동력비행기로의 체계적 발전 끝에 얻어진 결과였다. 그날 Orville이 처음 조종하여 약 12초, 37 m(120 ft)를 비행했고, 그 후 네 번의 비행을 통해 가장 긴 것은 윌버가 59초, 약 260 m(852 ft)를 날았다.
이 비행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뜨는 것”이 아니라, “조종 가능한, 동력에 의한 지속 비행(controlled, powered, sustained flight)”을 최초로 달성했다는 점이다. 라이트 형제는 날개 뒤틀림(wing-warping), 엘리베이터(elevator), 러더(rudder)를 이용해 비행기의 피치(pitch), 롤(roll), 요(yaw)를 조절하는 제어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개념은 후대 비행기 조종의 기본 원리로 남았다. 이 날은 종종 “인류 최초의 동력비행 성공일”로 기록되며, 많은 국가에서 비행기의 발명이란 곧 라이트 형제의 성취를 의미하게 되었다. 라이트 형제는 기계 설계나 자금 규모 면에서 화려하지 않았지만, 비행을 ‘제어 가능한 현실’로 만들었다. “제어 기술 + 엔진 + 프로펠러 + 경량 구조”라는 조합으로 해결했고, 이것이 비행 성공의 핵심이었다.
✈ Alberto Santos-Dumont – 유럽 무대에서 성공한 개척자


산토스 뒤몽은 브라질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유럽에서 활동한 항공 개척자였다. 그는 원래 풍선과 비행선(dirigible) 쪽에서 명성을 얻었다. 1901년, 그의 비행선 No.6는 파리 에펠탑 주변을 비행해 당시 큰 주목을 받았고, 그는 “공기의 제어 가능성”을 입증하며 항공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는 무게가 공기보다 무거운 기체(heavier-than-air)에 동력을 붙여 비행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06년 프랑스 파리 인근의 바가텔 경기장(Bagatelle)에서 시험된 14‑bis.
1906년 10월 23일, 14-bis는 자체 엔진에 의한 동력으로 이륙해 약 60 m를 날았고, 11월 12일에는 공식 심사단 앞에서 220 m를 비행해 약 6 m 고도를 유지했다. 이 비행은 당시 유럽에서 첫 동력 비행으로 공식 인증되었고, 이후 유럽 항공 역사의 출발점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이러한 공공 시연(public demonstration)과 기록 인증(record certification)이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14-bis를 “대중 앞에서 증명된 최초의 실제 비행기”로 높이 평가한다. 다만 기술적으로는 14-bis의 구조나 성능이 후대 비행기에 비해 매우 원시적이었고, 비행도 짧고 낮은 고도 위주였다. 그것이 ‘지속 가능한 항공 교통수단’으로 발전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Santos-Dumont의 강점은 “공공 앞에서, 인증을 받은, 자체 동력 + 자체 이륙”을 해냈다는 점이다. 그는 비행의 ‘형식적 요건’을 충족하고, 이를 통해 항공이 단순한 과학 실험이 아니라 공공 기술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 왜 “최초의 비행기”는 누구냐는 질문이 쉽지 않은가
위 세 인물의 시도와 결과를 나란히 놓으면, 단 하나의 “정답”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는 사실이 보인다.만약 “인류 최초로 무인 동력비행 성공 → 곧 사람 태운 비행기를 만들려 시도한 사람”을 본다면, 랭글리 공로는 무시할 수 없다. 그의 연구는 이후 항공공학 연구의 기반이 되었다.
만약 “사람을 태우고, 동력으로, 제어 가능한 비행에 실질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기계”를 본다면 라이트 형제가 가장 유력하다. 제어-조종 시스템, 프로펠러, 경량화, 조립에 이르는 항공기의 기본 구성 요소 대부분을 그들이 완성했다. 만약 “공공 앞에서, 인증된, 자체 엔진 + 자체 이륙 비행기를 보여 준 최초”라는 기준이라면 산토스 뒤몽의 14-bis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항공 역사를 둘러싼 논쟁—특히 미국과 브라질 사이의 민족주의적 논쟁은 바로 이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에게는 기술적 완성도와 조종 가능성이 중요하고, 어떤 이에게는 공공의 증명성과 기록이 더 중요하다. 결국 “최초 비행기”라는 타이틀은 단 하나의 절대적 사건이라기보다, 여러 조건과 평가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역사적 해석의 문제’인 셈이다.
✈ 뒤늦게 “최초의 비행”을 인정받게 된 라이트형제

스미스소니언은 원래, 그 기관의 전 수장이었던 Samuel P. Langley 의 업적을 우선시했다. 랭글리는 1903년 “에어로드롬(Aerodrome A)”이라는 유인 동력 비행기를 개발하려 했고, 이 시점에서 “최초 동력비행기 시도”라는 점을 들어 기관 내부에서 존중을 받았다. 1914년에는 다른 항공 선구자 겸 제작자인 Glenn Curtiss 가 랭글리의 에어로드롬을 개조해 몇 차례 짧은 물 위 이착(“hop-flights”)을 성공시키면서, 스미스소니언은 이를 근거 삼아 “Aerodrome A가 최초의 인간 탑승 동력비행기였다(capable of sustained free flight)”는 내용으로 전시 라벨을 붙였다. 이 시도가 사람들에게 “랭글리가 최초”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이 ‘비행’은 원래 1903년의 오리지널 랭글리 기체가 아니라, 1914년에 개조된 형태였고, 원본 비행 시도는 실패했으며, 게다가 조종 제어(controlled flight)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실패한 1903년 비행 + 나중에 조작된 짧은 비행”을 두고 ‘최초 동력비행기’라고 주장했던 것이 근본 문제였다. 이런 스미스소니언의 태도는, 기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명확한 “조종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동력비행(first controlled, powered, sustained flight)”을 이룬 Wright 형제의 1903년 비행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Wright 형제의 ‘최초’라는 타이틀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랭글리 에어로드롬을 1914년 개조한 것과 1903년 원본 시도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 그리고 Curtiss의 물 위 비행이 “sustained, controlled flight”라 보기 힘들다는 비판이 쌓였다. 1921년, 영국의 변호사이자 Wright 형제의 지지자였던 Griffith Brewer 가 영국 왕립과학원에서 발표한 연설은 이런 비판의 정점이었다. 그는 해몽즈포트(Hammondsport)에서 이뤄진 비행이 원래 랭글리 기체가 아닌, 개조된 것임을 폭로했다.
이 폭로는 항공계와 언론,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스미스소니언은 자신의 전시 태그와 주장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공식적으로 입장이 바뀐 것은 1942년이었다. 그 해 연례보고(annual report)에서 스미스소니언은 랭글리 에어로드롬이 원래 1903년에는 비행에 실패했음을 명시하고, Wright 형제가 실제 “처음으로 조종 가능한 동력비행”에 성공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Wright 형제의 기체, Wright Flyer (1903년 비행기)는 당장 스미스소니언에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형제는 실망과 불신 때문에 1928년 원래의 Flyer를 영국 런던의 Science Museum, London 에 기증했다. 이후, 1942년 스미스소니언의 공식 수정을 계기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1948년 Orville Wright의 유언 집행자들이 Flyer를 1달러에 스미스소니언에 이양했고, 그때서야 비로소 미국 내 박물관에 돌아와 전시되기 시작했다.
✈ 핵심 의미와 남은 논쟁
이 사건은 단지 누가 “최초”인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기관 권위, 정치·사회적 영향력, 후대 명성, 기록과 인증이라는 제도적 구조가 어떻게 “역사적 사실”을 뒤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결국 Wright 형제가 인정받은 이유는 단순한 ‘공중에 잠깐 뜸’이 아니라, “조종 가능한, 동력에 의한, 지속 가능한 비행”이라는 현대 항공기의 본질적 요건을 충족했다는 평가 덕분이었다. 다만 이후에도 (예: Gustave Whitehead 등 다른 초기 비행 시도자를 주장하는 이들) “누가 진정으로 최초인가”라는 논쟁은 남아 있다. 스미스소니언은 “1903 Wright Flyer가 역사상 최초의 동력비행기”라는 지위를 유지하며, 다른 주장은 증명이 부족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