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의 비극을 잉태한 소련의 사냥개: 수호이 Su-15 ‘플래건’
항공 동호인들에게 Su-15는 날렵하고 강력한 요격기이지만, 한국인들에게 이 비행기는 단순한 기계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1978년과 1983년, 두 번이나 **대한항공 여객기를 격추(또는 강제 착륙)**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냉전이라는 서늘한 시대 상황 속에서 탄생하여, 민간인 희생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남긴 **Su-15 플래건(Flagon)**에 대해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1. 개발 배경: “미국의 폭격기를 막아라”
1960년대 초, 소련 방공군(PVO)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미국의 전략 폭격기 B-52와 초음속 폭격기 B-58, 그리고 고고도 정찰기 U-2가 언제 소련 영공을 침범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 기존 기체의 한계: 당시 주력 요격기였던 Su-9과 Su-11은 기수(코)에 공기 흡입구가 있어 대형 레이더를 달 수가 없었습니다. 레이더가 작으니 적을 멀리서 찾을 수 없었죠.
- 새로운 디자인: 수호이 설계국은 공기 흡입구를 동체 양옆으로 옮기고, 기수 전체를 거대한 레이더 돔으로 채워 넣는 설계를 고안합니다.
- 목적: 오로지 **”빨리 날아올라, 멀리서 적을 발견하고, 미사일로 요격한다”**는 순수한 요격 임무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2. Su-15의 기술적 특징
Su-15는 서방의 다목적 전투기(F-4 팬텀 등)와 달리, 철저하게 소련 방공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설계되었습니다.
① 연필 같은 동체와 델타익
NATO 코드명 **’플래건(Flagon, 술병)’**처럼 길쭉하고 날렵한 동체를 가졌습니다.
- 마하 2.1의 속도: 강력한 쌍발 엔진을 장착해 초음속으로 빠르게 적에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초기형은 단순한 삼각 날개(델타익)였으나, 나중에는 이착륙 성능을 높이기 위해 날개 끝을 살짝 꺾은 ‘이중 델타익’으로 개량되었습니다.
② “기관포는 없다” (초기형)
미국의 F-4 팬텀처럼, Su-15도 초기에는 기관포 없이 오로지 공대공 미사일만 장착했습니다.
- 자동 요격 시스템: Su-15 조종사는 독자적으로 판단하기보다, 지상 관제소의 지시를 철저히 따랐습니다. 지상 레이더가 적을 포착하면 데이터 링크를 통해 Su-15를 적 근처까지 유도해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③ 강력한 레이더, 그러나…
기수에 대형 레이더를 달았지만, 당시 소련의 전자 기술 한계로 서방제 레이더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습니다. 특히 저공으로 침투하는 적을 탐지하는 능력(룩다운)이 부족했습니다.
3. 우리와의 악연: 두 번의 KAL기 사건
Su-15는 실전에서 적 전투기와 싸운 기록보다, 민간 여객기를 요격한 기록으로 더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안타깝게도 모두 대한항공이었습니다.
🇰🇷 1978년 KAL 902편 격추 미수 사건
- 사건: 프랑스 파리를 출발해 서울로 오던 KAL 902편이 항법 장치 고장으로 소련 영공(무르만스크)에 진입했습니다.
- 요격: 출격한 Su-15 조종사는 보잉 707 여객기임을 확인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상부는 격추를 명령했습니다. 조종사는 미사일을 발사해 날개 일부를 절단시켰습니다.
- 결과: 다행히 여객기 조종사의 뛰어난 기량으로 얼어붙은 호수 위에 비상 착륙하여 대부분의 승객이 생존했습니다.
🇰🇷 1983년 KAL 007편 격추 사건
- 사건: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오던 KAL 007편(보잉 747)이 사할린 상공 소련 영공을 침범했습니다.
- 비극: 당시 소련은 미국의 정찰기와 혼동하여 격추 명령을 내렸고, Su-15 조종사(겐나디 오시포비치)는 두 발의 미사일을 발사해 여객기를 격추시켰습니다. 탑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한, 냉전 시대 최악의 민간인 피격 사건이었습니다.
4. 또 다른 희생자: 유리 가가린?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죽음에도 Su-15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 1968년, 가가린이 MiG-15 훈련기를 타고 비행하던 중, 인근에서 테스트 비행을 하던 Su-15가 구름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음속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 이때 발생한 강력한 후류(와류)에 휘말려 가가린의 비행기가 조종 불능에 빠져 추락했다는 것이 기밀 해제된 문서들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 수호이 Su-15TM 제원
- 승무원: 1명
- 길이: 19.56 m / 날개폭: 9.34 m
- 엔진: 투만스키 R-13-300 터보제트 2기
- 최고 속도: 마하 2.1 (2,230 km/h)
- 상승 한도: 18,100 m
- 무장: R-98(AA-3) 공대공 미사일 2발, R-60(AA-8) 단거리 미사일 2발, (후기형은 기관포 포드 장착 가능)
- 주요 임무: 본토 방공 요격
마무리하며
수호이 Su-15는 기계적으로는 임무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우수한 요격기였습니다. 하지만 경직된 지휘 체계와 냉전의 극단적인 긴장감이 만들어낸 **’과잉 대응’**의 도구로 사용되면서, 역사상 가장 피 묻은 손을 가진 전투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