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의 역사, 로열 항공기 공장 B.E.2를 알아보자

✈️ 너무 안정적이라 슬픈 비행기: 비운의 걸작, ‘B.E.2’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군이 가장 많이 보유했던 비행기는 스핏파이어나 카멜 같은 날렵한 전투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B.E.2라는 2인승 복엽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비행기는 전쟁터에서 **”포커의 먹이(Fokker Fodder)”**라는 치욕적인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왜 이 비행기는 영국 조종사들의 무덤이 되었을까요? 오늘은 과학적인 설계가 전쟁터의 현실을 만나 어떻게 비극을 낳았는지, B.E.2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1. 개발 배경: “비행기는 흔들리면 안 돼!”

B.E.2의 개발은 전쟁 전인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영국 군 수뇌부는 비행기의 역할을 오직 **’정찰(Reconnaissance)’**로만 한정했습니다.

  • 안정성(Stability) 지상주의: 군부는 조종사가 하늘에서 지도를 그리고 사진을 찍으려면, 비행기가 흔들리지 않고 저절로 수평을 잡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과학적인 설계: 왕립 항공 공장(Royal Aircraft Factory)의 천재적인 연구원 에드워드 버스크(Edward Busk)는 이 요구에 맞춰 **’고유 안정성(Inherent Stability)’**을 완벽하게 구현해냅니다.

  • 결과: B.E.2c 모델에 이르러서는 조종사가 조종간에서 손을 떼도 비행기가 알아서 수평을 잡고 날아가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당시 기술로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2. B.E.2의 주요 특징과 치명적 결함

B.E.2는 평화로운 시기에는 최고의 비행기였을지 모르지만, 전쟁터에서는 최악의 특징을 가진 기체가 되었습니다.

① 지나친 안정성 = 기동성 제로

‘안정적이다’라는 말은 반대로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 B.E.2는 선회를 하려면 엄청난 힘으로 조종간을 당겨야 했고, 반응도 한 박자 늦었습니다. 적기가 공격해 올 때 급선회로 피하는 것(Evasive Action)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② 최악의 좌석 배치

이 기체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설계는 좌석 위치였습니다.

  • 조종사가 뒷자리, 관측수(사수)가 앞자리: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해 이렇게 설계했는데, 앞자리에 앉은 관측수는 날개 지지대(Strut)와 와이어, 그리고 바로 뒤의 프로펠러에 갇혀 있었습니다.

  • 사격 불가: 적기가 나타나도 관측수는 총을 쏠 각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뒤로 쏘려면 조종사 얼굴을 향해 총을 겨눠야 했으니까요.

③ 느린 속도와 약한 엔진

초기형은 르노 엔진을, 후기형은 RAF 1a 엔진(90마력)을 썼는데, 덩치에 비해 출력이 약했습니다. 무거운 정찰 장비와 폭탄을 실으면 기어가는 수준이었습니다.


3. “포커의 먹이 (Fokker Fodder)”

1915년, 독일의 **포커 아인데커(Fokker Eindecker)**가 싱크로나이즈 기어(프로펠러 동조 기관총)를 달고 등장하자 대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 죽음의 덫: 포커 전투기가 뒤에서 공격해오면, B.E.2는 피할 수도(둔한 기동성), 반격할 수도(앞에 갇힌 사수) 없었습니다. 영국 조종사들은 이 기체를 타고 나가는 것을 **”자살 임무”**라고 불렀습니다.

  • 고집스러운 군부: 일선 조종사들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영국 수뇌부는 “안정적인 정찰기가 최고”라는 고집을 꺾지 않고 1917년까지 이 기체를 최전선에 투입했습니다.


4. 뜻밖의 부활: 밤의 사냥꾼 (Night Fighter)

낮에는 ‘먹잇감’이었던 B.E.2가 밤에는 ‘사냥꾼’으로 변신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 야간 비행의 난제: 당시에는 야간 투시경이나 레이더가 없어서 밤에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위아래도 구분하기 힘들었죠.

  • 안정성의 재발견: 그런데 B.E.2의 그 **’지나친 안정성’**이 빛을 발했습니다. 조종사가 방향 감각을 잃어도 기체가 알아서 수평을 잡아주니, 야간 비행이 훨씬 안전했던 것입니다.

  • 제펠린 킬러: B.E.2는 영국 본토를 폭격하러 온 독일의 거대 비행선 **제펠린(Zeppelin)**을 요격하는 야간 전투기로 개조되어 훌륭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 B.E.2c 제원 요약

  • 종류: 2인승 정찰기 / 경폭격기

  • 제작사: 왕립 항공 공장 (Royal Aircraft Factory)

  • 승무원: 2명 (앞: 관측수, 뒤: 조종사)

  • 엔진: RAF 1a 공랭식 V8 엔진 (90마력)

  • 최고 속도: 116 km/h

  • 체공 시간: 약 3시간

  • 무장: (보통) 관측수용 루이스 기관총 1정, 소형 폭탄


마무리하며

왕립 항공 공장 B.E.2는 “기술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안정성’이라는 목표는 완벽하게 달성했지만, 전쟁이라는 환경이 요구하는 ‘기동성’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희생 속에서도 묵묵히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나중에는 야간 방공망의 주역으로 활약한 이 둔한 비행기의 헌신은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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